사진을 찍는 다는 것

내가 일상의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
사진을 찍는 다는 것

내가 일상의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

#1
나는 느린 삶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식물에 물을 주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생크림으로 버터를 만들고, 남은 과일로 만든 잼으로 아침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
물을 끓여 향긋한 찻잎을 골라 차를 우리거나, 햇살과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독서 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느린 삶을 살다보면, 호흡은 느려지고, 감각은 예민해진다. 가만히 음미하고, 곱씹어보고, 마음에 차곡차곡 담는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오래오래 곱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사진이다.
사진 한 장에 내가 기억하고 싶은 그 순간의 미세먼지 농도, 계절, 들려오는 백색소음과 틀어놓은 음악, 기분을 최대한 많이 눈, 귀, 피부로 담을 수있다.
그러면 보통의 날도 특별한 날처럼, 기억하고 싶은 날은 더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어 좋다.


#2
대학생 때 취직 축하 선물로 캐논 미러리스 카메라를 받았다.
나의 첫 카메라였다.
다음 해 늦은 여름, 첫 휴가로 제주도에 갔다.
둘째 날 늦은 오후에 서울에서 어머니가 오시기로 해서, 숙소 체크아웃하고 시간이 남았다. 
점심과 커피 한 잔 정도 하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혼자 반나절을 보내자니 조금 막막해서 여행 앱을 통해 나와 비슷한 처지인(동행자가 잠시 부재한 상태)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소니 미러리스를 들고 온 남자와 부산에서 온 언니를 만나 점심과 커피 한 잔을 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그 남자는 인천에 살았고, 운전을 좋아했고, 사진찍는 걸 좋아했다. 
밤의 한강, 근교의 카페와 드넓은 공원. 이리저리 나를 데려가 자신의 카메라에 담아주었다.
붉게 물든 가을에는 제천의 단풍나무 길로 데려갔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영종도에서 일몰을 보여줬고, 
한겨울에는 겨울 바다로 데려가 나란히 손을 잡고 사진에 담았다. 
그는 나를 담고, 나는 그를 담고 그렇게 우리는 7년을 함께 했다.


#3
정말 멋진 순간을 마주했을 때, 글에 소질 있는 사람은 시상이 떠오를 것이고,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은 순간을 노래로 표현할 것이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순간을 그려낼 것이다.
나는 글도, 악기도, 그림도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이런 나에게 마주한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사진이다.
나에겐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시선을 갖고 있다. 
신장이 166.45cm인 사람이 두 발로 섰을 때의 시선, 쭈구려 앉을 때의 시선, 좌우로 42도 정도 옆구리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의 특별한 시선.
물론, 사진도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을 더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셔터만 눌러도 나의 시선으로 멋진 순간을 기록할 수 있으니 사진만큼 좋은게 없는 것 같다.


#4
최근, 자동 필름 카메라를 샀다. 자동이지만, 한 롤에 36개의 장면만 담을 수 있다는 제한적인 특성때문에, 한 장을 찍을 때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고민해서 담는다.
그래서인지, 필름 사진들은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것보다도 그때의 순간을 더 많이 기억해내고, 더 많은 여운을 가져다 준다.


#5
사진은 결국 사진사의 생각과 취향을 보여주는 거라, 사진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게 어떤 것인 지 알게된다.
구름, 햇살, 꽃, 나무, 풀, 윤슬, 반짝임, 그림자, 반듯한 건물, 예쁜 상점, 맛있는 음식, 디저트, 음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6
날 좋을 때 좋은 카페나 식당, 예쁜 공간을 보면 부모님이랑도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는 타지에서 지낸 탓에, 너무나도 고된 직장생활을 보낸 탓에, 좋은 사람을 너무 일찍 만나버린 탓에, 성인이 되고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고맙게도 그는 내가 부모님과 최대한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고, 그가 먼저 같이 데이트 하자고 하기도 한다.
장모와 사위의 공통 관심사가 사진인 덕분에 부모님과의 데이트에선 사진이 빠질 수 없다.
꼭 그 날의 우리와 부모님을 남기려고 한다. 사진 네컷을 찍으러 갈 때도 있고,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기도 한다. 필름 카메라를 사고 나서는 꼭 챙겨 나가는데, 부모님에게 꼭 한 컷씩 찍어달라고 조른다. 초점을 맞추고 딸의 얼굴과 빛을 한참을 바라보며 찍어주신 그 날의 내 모습과 내가 찍은 그날의 부모님의 모습은 보고 또 봐도 뭉클하고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글의 마지막 사진이다.

shot by Theo

Member discussion